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6세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몹시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해서 수감되었을 때는 [[교도관]]의 가정사정까지 신경을 써주거나 프랑스 국내에서 [[고문]]을 금지하기도 했다. 살짝 [[백치미]]가 있는 건지, [[새벽]] [[기도(종교)|기도]]를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했으며, 개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. [[전통 가톨릭]] 계열 단체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혁명의 산물[* 자유주의, 민주주의, 공화주의, 그리고 무엇보다도 '''세속화'''였다.]을 부정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루이 16세에게 동정적이다. [[미국]]에서는 독립전쟁을 지원했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 비해서는 인기가 있었으며 [[식탐]]이 많은 [[대식가]]였다. 갑갑한 궁중과 국정에서의 심한 [[스트레스]]를 [[식사|먹는 것으로 해소한 듯]]. 사실 식탐 자체는 루이 14세를 보면 알겠지만 부르봉 왕가의 전통이었다. 오죽하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적 특징이 [[주걱턱]]이라면 부르봉 왕가는 과한 식탐으로 인해 살찐 둥근 턱이 유전 같은 것이었다. 루이 16세는 자신이 사형당하는 날 아침에 [[최후의 만찬]]으로 [[커틀렛]] 6인분과 큰 [[통닭]], 많은 양의 [[달걀]], [[베이컨]], 프랑스산 [[와인]]과 스페인산 와인을 실컷 먹었다고 전해진다. 풍족하게 잘 먹고 활동한 탓인지 키도 193cm나 되는 장신에 위풍당당한 덩치를 자랑했다. 루이 16세 일가가 [[바렌 사건|프랑스를 탈출하려다가]] 혁명군에게 잡힌 원인 중 하나는 바로 [[족발]]이다. 루이 16세의 탈출 마차가 생트므누(Sainte-Menehould)이라는 작은 도시에 이르렀을 때 그는 시장기를 느꼈다. 루이 16세는 그 도시의 특산품이 돼지족발찜(Pieds de porc à la Sainte-Menehould)이라는 것을 알고는, 마차를 멈추게 한 후에 돼지족발 요리를 먹고 가자고 고집했다. 왕이 명령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, 문제는 돼지족발찜의 조리시간이 매우 길다는 것이었다. 먼저 돼지를 잡아서 족발을 채취한 후에 끓이고, 끓여서 삶은 족발을 또 건져내서 살짝 구운 후 또 저며서 빵과 같이 내어야 하기 때문에, 조리시간이 최소한 4시간은 되었다. 물론 국왕 일행이 생트므누 도착 후 바렌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은 실제 조리에 걸린 시간인 4시간까지는 아니었으며, 식당에서 한창 만들고 있거나 미리 준비하고 있던 요리를 주문하였다든지 하여 약 1시간 안팎으로 지체된 것으로 보인다. 아무튼 1시간 정도 지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, 루이 16세는 기어이 돼지족발찜으로 식사를 마친 후 다시 길을 떠났다. 요약해 이야기한다면 루이 16세는 족발을 먹고 탈출길에 오르느라 탈출이 늦어져 욕보게 된 것이라고 한다. 그러나 [[바렌 사건]]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다른 요인들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므로, 단순히 맛있는 요리만이 원인은 아니다. 게다가 해당 족발 이야기의 출처는 소설가 뿐만 아니라 미식가, 향락가이기도 했던 [[알렉상드르 뒤마]]가 저술한 [[http://cuisinerebelle.canalblog.com/archives/2009/02/06/12394718.html|프랑스 요리 대사전]]이란 미식서적인데 뒤마의 성향이나 좀 많이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을 고려하면 뒤마가 저 생트므누란 지역 사람들과 합작으로 꾸며낸 [[야사]]일 가능성이 농후하다. 이를 종합하면 혁명도 있기 한참 전인 과거에 평소 루이 16세가 이곳을 시찰하던 중 족발찜을 수라로 맛보고 좋은 평을 한 적은 있었으나, 뒤마가 그런 왕실 일화를 듣고 착안하여 아예 족발찜으로 식사를 한 시점을 바렌 사건의 시점으로 각색해서 스토리텔링을 기획하여 홍보를 한 것이라는 것이다. 말 그대로 "왕도 먹다 --진짜-- 죽어도 모를만큼 맛있는 우리 고장 족발!"은 시대를 초월해서 누가 생각해도 훌륭한 광고 스토리니깐 말이다. 전설에 의하면 루이 16세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왕의 피를 닦아 호리병에 보관했다고 한다. [[이탈리아]]의 한 부호가 소장하고 있던 그 호리병을 발견했는데, 손수건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. 호리병 속에 들어있는 말라 굳어진 피를 분석한 결과, 실제 루이 16세의 것이 맞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규명됐다. 루이 16세의 조상 [[앙리 4세]]의 머리에서 추출한 유전자와 대조했다고. [[http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4&oid=079&aid=0002429069|관련 기사]] 다만 기자가 [[영어]]로 된 원본 기사를 그대로 [[번역]]했는지 앙리 4세를 [[헨리 4세]]라고 썼다.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게 한 자들도 끝이 좋지 못했다. [[장폴 마라]]는 처형에 반대했던 온건파에 의해 암살, [[자크 르네 에베르]]와 [[조르주 당통]]은 파벌 대립으로 처형. 그리고 [[생쥐스트]]와 [[로베스피에르]]는 [[테르미도르 반동]]으로 처형되며 모두 자신들이 없앤 왕처럼 제명에 죽지 못하게 되었다. 귀족들이 하도 세금을 안 내자 도박으로 세금을 거뒀다고 하는데, 그 도박은 [[스페이드의 여왕]]에 나오는 파로(Faro)다. 당시로서는 물론, 현대 [[프랑스인]]들까지 포함해서도 보기 드문 [[영어]] 능력자였다.[* 정작 비슷한 시기의 사람인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는 다른 여러 외국어에 능했음에도 오직 [[영어]]만 몰라서, [[세인트헬레나]] 섬에서의 귀양 생활 중에 틀린 영어 문법으로 정신승리하기도 했다.] [[에드워드 기번]]의 책인 로마제국 쇠망사의 원서를 직접 번역했다고 한다. 영어는 물론, [[고대 그리스어]]와 [[라틴어]] 등의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. [[스페인 국왕]] [[카를로스 4세]]와, 그 동생인 [[양시칠리아 왕국]] 초대 국왕 [[페르디난도 1세]]와 이종사촌간이다. 또한 카를로스 4세의 왕비 [[마리아 루이사(파르마)|마리아 루이사]]는 루이 16세의 고종사촌이며[* 루이 16세의 고모인 루이즈 엘리자베트와 [[파르마 공국|파르마]] 공작 [[필리포 1세(파르마)|필리포 1세]]의 딸.] 페르디난도 1세의 왕비 [[마리아 카롤리나]]는 루이 16세의 왕비인 [[마리 앙투아네트]]의 언니다. 훗날 [[러시아 혁명]]으로 인해 처형당한 [[러시아 제국]]의 마지막 황제 [[니콜라이 2세]]와도 비슷한 면이 많다. 두 사람 모두 인간적인 면모와 인품은 굉장히 좋았지만 군주로서는 낙제점에 가까웠다는 점, 아내와 자식들까지 혁명에 휘말려 그 끝이 좋지 못했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. 또 왕비가 독일어권 왕족이었고 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실패했다는 점도 같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